올림머리가 좋다고 해서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그 애는 나를 보면서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다. 순진해서 어떻게 살래. 그 애의 눈에 비친 나는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찌되었든 나는 즐거웠고, 그 애는 자신의 이상형을 따라 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 애와의 이별은 당연했다. 안녕, 하고 만나서 안녕, 하고 헤어지기. 그게 당연한 이치 아닐까. 자연스레 그 애한테 오는 연락이 줄어들었고, 나는 첫 연애를 했으니까 괜찮은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사람들이 내게 묻곤 했다. 정말로 괜찮아? 응,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더라도 상관없었다. 상대에게 원하는 이상형의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내가 그 모습을 따라 하는 것. 그런 기만적인 연애가 좋았다. 어차피 너도 꼭 나일 필요는 없잖아? 그냥 혼자가 싫은 거잖아? 나도 마찬가지니까 우리 그냥 즐겁게 놀자. 그게 나의 연애였다.

 

 너는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내 스무 살은 나조차 감당하기 힘들었다. 스무 살이 되자 끊긴 지원과 하루가 멀다고 나가는 아르바이트, 그리고 먼지가 가득한 고시텔.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음에도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피였다. 즐거움에 온몸을 맡겼다. 자극을 위해선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캘린더를 빼곡하게 채우며 약속을 잡았고, 술자리에서 상대방의 이름조차 묻지 않은 채 놀던 날들을 이어갔다. 이리저리 부유하듯이 온갖 인맥을 타고 돌며 사람을 만났다. 그래야 내가 웃는 얼굴로 있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면 정말 즐거운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사실 나를 지우고 싶었다.

 

  너는 처음부터 나한테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건 내 착각이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았다. 우리의 첫 만남은 개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삭막했고, 당시의 나는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너는 무죄가 맞았지만 내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 그날 나는 고까운 표정으로 너한테 시선조차 주지 않았고, 그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되려 나에 대한 인상을 1도 남기지 않았으며 무심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아무것도 그려내지 않았다. 네 앞에 있자면 나는 어쩐지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너한테 찾아가곤 했다. 무심한 표정, 마주치지 않는 시선, 없다시피 한 나에 대한 생각. 나는 그런 것들을 편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너한테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돌린 결과 너는 나한테 어떤 관심도 없을 것이라 여겨 나온 말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서로가 보여주고 싶은 면밖에 보지 못하잖아. 그게 당연한 거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잖아. 그렇다면 A가 나한테 A1의 모습만 보여 준다면 내게 있어 A는 그저 A1이 아닐까. 우리가 온전한 A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기만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A1은 내게 새롭게 정의된 B가 될 거고, 나는 점점 B를 곱씹다 씹어보다가 그 모습이 어느새 C가 되어 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결국 C가 아닐까. 우리는 C를 보며 A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동시에 타인에게 내 모습 그대로 드러낼 각오조차 되지 않은 겁쟁이에 가까웠다. 사람들이 내 말에 동조하길 원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 홀로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겨질까 봐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그래, 이 말은 결국 길고 긴 나의 변명이었다. 내가 A1의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해 내가 아닌 결국 C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 업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 나름의 결심이었다.

 

  그랬기에 술 먹고 키스한 그날 역시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너를 너무 쉽게 대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좋아했겠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나고 나서 떠올려보면 짐작이 가는 것들은 참 많았지만, 그런데도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는 미안하지만 하나였다. 내게 있어 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쁜 놈은 결국 나 혼자였음을 몰랐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별거 없었다. 내가 정신을 덜 차려서였다. 너는 네 전 애인과의 이별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분간 비밀 연애를 하자고 말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응 백일. 백일 정도 겨우 갈 연애.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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