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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쁜 게 아니잖아.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매일 뜨거워진 머리와 코를 부여잡으며 아르바이트 하고 학교에 다녔다. 에이를 받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첫학기를 제외하고는 등록금을 내지 않았다. 교수님의 눈에 드는 건 늘 즐거웠다. 다른 애들이 넌 뭘 해도 될 애라고 할 때마다 즐거움에 눈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내가 술·담배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게임중독보다는 낫지 않아? 성취감도 중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나를 갉아먹는 중독이 그림자에 숨어있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쓸모없는 사람에서 순
윤사막의 색
윤사막 칼럼리스트
2022.08.1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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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떠올리면 늘 소설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의 이야기를 내 입으로 읊는 기분. 온전히 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그 작은 방에서 나는 낯설음을 느끼고 있었다. 과외쌤 추천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입을 움직이고 있지만 어쩐지 멍한 느낌에 졸리기까지 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종종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힘들었나? 그래, 힘들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 이야기였다. 나는 울어야 했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고, 힘든 과거를 털어놓아야 했으나 힘들었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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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막 칼럼리스트
2022.08.0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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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난 이랬나.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술을 먹고 있었지. 무슨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쟤 뭔가 나 좋아할 것 같다. 근데 재미가 없네. 집? 안 가. 거길 왜 가. 재미도 없는데. 따라오라고? 내가 왜? 즐거우면 좋은 거 아닐까. 여태까지 너무 우울했으니 난 좀 즐거워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매일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놀았다.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 낯선 동네니까 아는 사람이라도 많아야지. 매일 떠돌아 다니다시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면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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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막 칼럼리스트
2022.07.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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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지를 엄마 앞에 펼쳐 보였다. 엄마는 여전히 믿지 않으려고 했다. 네가 어디가 아파서.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믿기지 않아 하는 엄마의 표정을 본 나는 눈을 내리깔며 엄마의 반응을 기다렸다. 결과지를 본 엄마와 동생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저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아프다는데. 아프다는 사실을 이렇게 인정받기 힘들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소리치지 않았다. 종이를 구겨버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나 아파요. 약이 이렇게나 많아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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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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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반엔 아픈 아이가 많았다. 우리는 새벽 감성이란 이름을 빌려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했고, 가끔은 별것도 아닌 일처럼 여기며 웃음으로 모든 것을 넘길 때도 많았다. 웃음. 우리는 서로의 아픈 부분을 건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웃음으로 넘기자. 그냥 듣고 넘기자. 그건 우리끼리의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말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았으나 할 수가 없었다. 내 말을 하고 싶은 날에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도 아빠가 생각나 그대로 닫아버렸다. 아빠는 종종 말했다. 집안 얘기를 밖에서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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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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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가 무서워졌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일 수렵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나 고민했다. 불투명한 유리를 통과해 베개로 내리쬐는 햇빛을 볼 때면 머리가 멈춘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몸을 일으켜 짐을 싸 학교에 갈 뿐이었다. 학교에 간다한들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감기는 눈을 이기지 못해 날카로운 볼펜 심이 교과서의 중심부터 모서리까지 쭉 그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날에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교과서에 얼굴을 박은 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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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막 칼럼리스트
2022.07.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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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병이 있다면 우울증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이리 죽고 싶어한 것도, 뜬눈으로 매일 밤을 헤매는 것도 전부 우울해서라고만 여겼다. 나의 조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성격적 문제일 뿐, 병이란 생각조차 못 하는 날을 수없이 보냈다. 불안함에 가만있지 못하는 것도, 들뜬 기분을 조절할 수 없어 매번 후회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나의 탓이었다. 원래 난 이랬나. 원래 난 어디에 있었지? 나는 그 어딘가의 끝에서 늘 방황했다. 불면과 기면, 조증과 우울, 폭식과 거식, 분노와 냉정, 동경과 혐오, 고립과 유대. 자기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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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막 칼럼리스트
2022.07.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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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윤에게‘나의’라는 단어를 감히 붙여도 되는 걸까? 나는 너의 데이나였고, 너는 나의 윤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너는 이제 이름이 생겼다. 더 이상 윤이 아니다. 너는 이제 ‘윤사막’이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쿠키로 만난 우리. 그러고 어떻게 관계를 이어갔더라. 아, 글이었던 것 같다. 글은 우리의 수단이었고, 매개였다. 말할 구석이 없던 우리에게 글이 생김으로써 말을 쏟아 놓을 수 있게 되었고, 말할 구석 없어 떠돌아다니던 우리를 모아주던 것도 글이었다.아니다. 우리를 모아준 건 너였다. 글을 써오면 질문을 하고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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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하 뉴트리션 칼럼니스트
2022.06.30 22:02